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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잠, 네멋대로 써라] [마리아마리아]활활 타오르는 절망에서 구해주소서

[마리아마리아]활활 타오르는 절망에서 구해주소서!

사로잡힌다는 말이 있다. 숨죽인 고통 속에 절망이 단지 일상처럼 느껴지던 창녀 마리아의 외침은 좁은 극장을 한 입에 삼켜버렸다. 쨍쨍 울리는 목소리에서 달콤한 음색을 붙이고 유혹적인 웃음을 은근히 던지더니, 슬픈 삶의 고독을 슬프게 노래하니 그 어떤 관객이 사로잡히지 않을 수 있을까?

‘마리아마리아’는 얼마 전 개봉했던 ‘패션오브크라이스트’의 전 단계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예수님이 아닌 예수님의 고통 속에 몸을 굽혔던 막달라 마리아가 주인공이긴 하지만 그 주제는 변함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뮤지컬 ‘마리아마리아’가 심각한 종교적 논쟁으로 공연을 일축하여 관객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리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마리아마리아’는 소외받은 한 인간, 창녀의 이야기다. 창녀란 자신의 몸을 팔아 생계를 유지한다.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평범한 사람들에게 그녀는 더럽고 어리석어 보이며 물질문명에 타협한 대표자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순수한 어린아이였던 과거는 있다. 그렇다면 그녀를 그렇게 변질되게 만든 이유는 무엇일까?

'마리아마리아‘에서 타락의 원인은 위선과 비리로 치장한 가진 자들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그렇게 한 인간을 타락시키고 내동댕이치고 이용한다. ’마리아마리아‘는 그렇게 고통과 좌절에 머무른 자들의 이야기다. 활활 타오르는 절망 속에서 자신을 거부하지 못하면서 그 죄악 속에 천천히 빠져드는 인간은 시간이 몇 백 년 흘렀어도 여전히 존재한다. 스스로의 정체성까지 희미해지는 현실의 굴레에서 스스로는 타인에게 짓밟히고 조롱당하고 무시당한다. 그런 그 순간에 상처투성인 자신을 위해 처음으로 무릎 꿇고 다정하게 포옹해주는 이가 있다면 그 누가 그이를 거부할 수 있을까..

‘마리아마리아’의 매력은 당연히 마리아다. 분명 먼 거리에서 봐도 그녀는 젊지 않다. 그런데 그녀가 무대에 등장하여 요염하게 치맛자락을 날리고 강렬한 눈빛으로 관객을 째려보며 화려한 곡조의 음색이 극장에 울려 퍼지자 관객은 토네이도 속에 빨려 들어가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녀의 카리스마는 등장부터 관객의 시선을 빼앗아 버리고 그녀의 목소리는 허공을 떠다니더니 어느 순간 관객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이다.

솔직히 처음에는 단순하고 복잡한 무대에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공연이 시작되자 하나하나 무대배경의 이유가 설명되고 그 무대 배경을 이용하여 무대를 질주하는 배우들의 날렵한 모습에 눈을 뗄 수 없다. 더욱이 마리아 혼자서 만이 아닌 모든 배우들의 조화로운 노래와 연기는 한두 달 연습한 자들의 모습이 아님을 상기시킨다.

물론 뒷부분에 예수님의 부활을 강조하기 위해 희망적인 마리아의 모습에 미진한 것이 아쉽다.좀더 마리아에게 포커스를 맞춰 예수님의 부활 자체가 아닌 예수님의 희생의 원인이, 마리아 삶이 절망에서 희망에서 바뀐 이유라는 자연스러운 결과를 돌출하는 면이 부족한 것 같다.

하지만 마리아의 회상장면이나 고통스러운 모습, 심정적인 갈등을 배우들의 등장과 노래의 어울림으로 표현한 모습은 과히 연출자와 극본가 그리고 음악가의 환상적인 콤비를 엿볼 수 있었다.

‘마리아마리아’를 보며 관객이 즐긴 것은 단지 무대와 연기와 노래가 아니다. 박수를 치고 싶어도 칠 수 없을 만큼 빠른 전개와 사건의 끊임없는 긴장감 요소는 현대적이며 감감적이고 노래의 음율 또한 관객에 귓가에 찰싹 달라붙을 정도로 감미롭다.

부디 서민의 주머니는 무시한 채 외국공연으로만 점칠하여 이익을 얻으려는 어리석은 자들이 이런 창작뮤지컬이 많아야 더 이상 뮤지컬에 관객이 등을 돌리지 않을거라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 공연이었다.

* 나비잠중얼거리다
- 2004년 6월에 본 공연이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지났는데..그때의 즐거움은 기억된다... 요즘에도 계속 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개인적으로 즐거워서 그런지 다른분들에게도 추천하고 싶다.. 물론..예전에는 소극장이라 가격이 저렴했지만..요즘에는 대극장에서만 하는지라...가격이 만만치 않는게 안타깝지만...-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