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져야 본전]일 때 투자한다
..... 어떤 구두닦이 아저씨가 매상이 오르지 않자, 고심 끝에 문밖에다 광고문을 써 붙였다. 그러자 갑자기 매상액이 5배나 뛰었다.
그 광고의 내용은 이러했다.
“한쪽 구두는 공짜로 닦아 드립니다!!!” .....
역사상 [부동산투자]로 성공한 사람은 누구일까? 미국의 부동산 황제 트럼프? 조용기 목사님? 법정 스님? 울주군 흥덕사 회주 영배 스님?
내가 생각하는 인물은, 고타마 싯다르타 즉 석가모니 부처님이다.
부처님이 보리수나무 아래서 깨달음을 얻은 후에 벌인 포교 활동은 부실기업 인수. 합병(M&A)에 비견될 수 있다. 역사상 최초의 사찰이라고 전해지는 죽림정사(竹林精舍)의 창건 과정은 그야말로 부동산투자의 진수를 보여 준다. 부처님은 M&A와 부동산투자로 성공하였고, 결국 성인(聖人)의 반열에 오른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부처님의 M&A 기법
부처님은 깨우침을 얻은 후 곧바로, 당시 인도에서 가장 세력을 떨치고 있던 배화교(拜火敎)의 교주 우루벨라 캇사파 3형제를 만나 제자로 삼아버렸다. 요즘의 부실기업 M&A와 너무 흡사하다. 이 사건으로 인해 부처님은 단숨에 무려 970명의 제자를 얻게 된다. 이 배화교의 교주는 당시 인도에서 가장 강성한 마가다 왕국(王國)의 빔비사라 국왕을 신도로 두고 있을 정도였다. 이런 빔비사라 국왕과 태자(太子)는 나중에 부처님의 열렬한 신도들이 되었지만 정치적인 이해관계가 달라져 태자가 부왕(父王)인 빔비사라 왕을 감옥에 유폐하고 왕위를 찬탈한다.
슈바라(메시아)를 자칭하던 배화교의 교주가 부처님을 진짜 슈바라(메시아)로 인정하자 당시 인도 전역에서는 부처님을 찾아 수많은 인파가 몰려들었다. 이렇게 모인 수천 명의 제자들과 함께 몰려다니면서 탁발을 하다 보니 동네마다 식량이 떨어질 지경이 되었다. 이 당시 인도에는 수행자가 탁발을 오면 반드시 식사대접을 해야 했다. 수행자는 탁발을 해야 하고, 법문을 들은 신도들은 수행자들에게 식사대접을 해야 하는 것이 불문율이다 보니 문제가 생긴 것이다.
[무소유(無所有)]는 최고의 [재테크 기법]
또 당시 수행자는 동굴이나 숲에서 참선을 하는 등 수행을 해야 하고 집을 안 갖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요즘 말하는 무소유(無所有)다. 아무 것도 갖지 않을 때 비로소 온 세상을 갖게 된다는 의미다. 그래서 부처님은 무소유 외의 다른 재테크에는 관심이 없었고, 아파트는 물론 단독주택을 장만하지 않았던 것이다.
부처님 생존 당시는 중국의 춘추전국시대를 방불케 하는 혼란의 시대였다. 당시 최대 강국인 마가다 왕국과 패권 경쟁을 하던 나라가 코살라 국(國)이었다. 부처님의 고향 카필라성은 코살라 국의 속국이었는데 이 코살라 국에서 돈이 제일 많은 부자가 부처님의 제자가 되겠다고 찾아왔다. 그 이름은 수닷타다. 경전에서는 그냥 장자(長者)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때부터 부처님의 부동산 투자기법이 빛난다. 이 장자가 부처님에게 수천 명의 제자들이 떠돌면서 탁발하지 않고 살 수 있게 절을 지어드리겠다고 했다. 이 장자의 눈에는 부처님이 탁발하는 모습이 떠돌이로 보인 모양이었다.
부처님은 당연히 거절했다. 예의상 사양한 게 아니고 거부했다. 부처님을 떠돌이 취급했다고 기분 나빠서 거절한 게 아니다. 탁발은 수행자의 중요한 수행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수많은 제자들을 거느리는 그 자체를 당시는 이단(異端)으로 보았기 때문에 부처님은 이단(異端)시비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밑져야 본전]인 부처님의 출가(出家)
당시 인도는 단독수행을 원칙으로 하는 바라문교(브라만교)가 사실상 국교나 다름없었다. 불교는 이 바라문교의 4대 계급제도(브라만.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드라)를 공격하면서, 바이샤. 수드라 등 하위계층들의 지지를 얻으면서 성장하고 있었다. 당시는 인도 사회가 물물교환 경제체제에서 동서양 간의 교류 확대로 인해 상업의 비중이 커지고 있던 시대라서, 불교는 특히 상인들의 지지를 얻고 있었다. 하지만 바라문교(브라만교)의 사제들은 오로지 자기들 계급의 이익에만 집중하며 새롭게 성장하는 다른 사회적 계급의 이익은 무시했다. 당연한 일이지만 불교도와 상인들은 서로 연대하며 공생관계로 발전했다. 불교는 상인 집단에서 현저하게 세력을 키워나가면서, 교역로를 따라 급속도로 전파되어 나갔다. 이리하여 바라문교 사제들과의 정치적 충돌은 불가피(不可避)하였다.
마가다 왕국의 입장에서는 요즘으로 치면 시골 군수 아들쯤 되는 자가 붓다(메시아)라면서 정치세력으로 성장하는 것을 가장 경계했다. 당연히 정치적인 문제가 있었을 것이다. 그것이 당시 인도 최대 강국인 마가다 왕국의 태자가 부왕을 죽이는 상황으로 치달은 것이다. 태자(太子)는 부왕(父王)이 부처님에게 설법 들으러 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쿠데타를 일으키고, 군사를 이끌고 부처님의 설법 현장으로 직접 쳐들어 왔다. 빔비사라 국왕은 뒷문으로 겨우 도망치지만 도중에 붙잡혀 감옥에 유폐된다.
그런데 이 태자는 부처님에게는 전혀 위해(危害)를 가하지 않는다. 부처님이 위대한 분이기에 그랬을까? 지금까지 3천년 이상을 전해 내려오는 인도 특유의 4대 계급제도 때문이다. 부처님의 계급이 국왕이나 태자보다 높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원래 군인, 공무원, 귀족, 왕족이 속하는 크샤트리아 계급이었고, 쿠데타를 일으킨 태자도 왕족이므로 크샤트리아 계급이다. 그런데 부처님은 깨달음을 얻은 자로 인정되어 슈바라 대우를 받게 됨으로써 최상 계급인 브라만계급으로 승격했기 때문이다. 마치 군대에서 고참 상사(上士)라도 신참 소위(少尉)에게 함부로 못 하는 것과 같다. 부처님의 가출(家出)은 처음부터 [밑져야 본전]인 게임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출가(出家)]라 한다.
부처님의 부동산투자 기법
그렇다 하더라도 정치적인 긴장관계가 조성되면 예외가 생길 수 있다. 그래서 부처님은 사찰 건립이 더욱 정치적인 긴장관계를 조성할 수 있기에 거부한 것이다. 이런 속사정을 알 리 없는 돈 많은 장자는 부처님이 예의상 사양하는 걸로 오해하고 부득부득 절을 짓겠다고 우겼다. 그러자 부처님은 일생일대의 승부수를 던진다. 마가다 왕국 땅은 정치적 긴장관계를 조성할 우려가 많아서 제겨둔다. 대신 고향인 카필라성의 종주국인 코살라 왕국 제타 왕자 땅으로 경치가 가장 좋은 곳을 지목하였다.
수닷타 장자는 곧 바로 제타 왕자를 찾아가 그 땅을 팔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제타 왕자는 시큰둥하게 말했다.
“수닷타야, 그 따위 사캬족의 고타마 싯다르타를 위해 내 땅을 팔라는 말이냐?”
“땅값은 달라는 대로 드리겠습니다.”
“오호, 그래? 그렇다면 네가 필요한 만큼의 땅에 금을 쫘-악 깔아라. 그 정도를 낼 마음이 있으면 한번 고려해 보지.”
제타 왕자는 당시 유명한 정치적 책략가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부처님이 이를 모를 리 없었을 것이다. 장자는 그 다음날부터 전 재산을 팔아 황금을 사들이고 수레를 동원하여 금을 가득 실어 날랐다. 황금이 제타 왕자의 땅에 깔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 광경을 지켜 본 제타 왕자는 수닷타 장자의 뜨거운 열정에 감동하여 자존심을 꺾고 마음을 바꾸었다. 제타 왕자는 말했다.
“수닷타, 그만둬라. 네가 필요한 만큼의 땅을 그냥 쓰고 그 황금은 건축비로 쓰도록 해라.”
이 얼마나 멋있고 감동적인 부동산 투자기법인가? 이로 인해 부처님은 3천명이 넘는 제자들이 춥고 배고프지 않고 공부에만 매진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할 수 있게 되었다(이 죽림정사가 마가다왕국에 있었다는 설도 있고, 기원정사라는 설도 있다).
그것도 마가다 왕국과 패권을 다투던 코사라 왕국의 최대 재벌인 수닷타 장자가 자발적으로 나서게 만들었다. 당시 유명한 정치적 책략가인 제타 왕자의 땅을 지목하고 제타 왕자의 마음을 움직였다. 이리하여 평생을 괴롭히던 이단 시비에서도 벗어났다.
이처럼 당시의 지배 엘리트와 자금력을 확보한 상업세력의 자발적 제휴를 성공시킨 죽림정사 창건 과정은, 이후 불교 공동체가 전 세계적으로 발전해 가는 과정에서 중요한 모델이 된다.
이 죽림정사에서 배우고 익힌 3천명이 넘는 제자들이 인도 각지를 다니면서 “우리 스승님이 붓다(부처님)”라고 외치고 다녔다. 실크로드(비단길)를 타고, 그리고 해상 교역로를 타고 인도 상인들은 중앙아시아. 동남아시아. 중국 등 가는 곳마다 불교공동체를 세웠다. 그곳 지배 엘리트와 상업세력과의 자발적 제휴를 모색하면서 선교활동을 했던 것이다.
부처님은 처음부터 자신이 ‘밑져야 본전’이라는 사실을 알고 출가했다. 결과적으로 당시의 지배 엘리트와 상업세력을 하나로 묶으면서, 죽림정사(竹林精舍)와 기원정사(祇園精舍) 창건이라는 승부수(勝負手)를 띄워 대성공을 거두었다.
인류구원사업조차 부동산투자의 안목이 중요하다
우리나라 여의도(汝矣島)는 원래 아무 쓸모없는 모래섬으로 ‘너나 가져라’는 뜻에서 유래되었다. 1970년대 황량한 여의도에 조용기 목사가 한국 최대의 교회를 짓겠다고 했을 때 교인들의 반대가 많았다. 물론 큰 건물을 지을 건축비도 마련되지 않았었다. 그러나 조용기 목사는 교인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973년, 신축 국회의사당만 있고 거의 허허벌판에 가까운 여의도 모래땅에 무려 수천 평에 달하는 부지를 확보하고 교회 이전을 단행하였다. 세계 최대 규모로 기네스북에 오른 여의도순복음교회 시대는 이렇게 열렸다.
죽림정사 창건 비화나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성공 신화는 인류구원사업조차 CEO의 리더십과 더불어 부동산투자의 안목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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