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창극단 '수궁가' 제작 간담회가 3월 28일 오전 11시 30분 프레스센터 20층에서 있었다.
국립창극단, 아시아 최초로 아힘 프라이어와 공동작업
전통 판소리 ‘수궁가’가 독일출신의 세계적인 오페라 연출가 아힘 프라이어(Achim freyer)의 손을 거쳐 글로벌 창극으로 다시 태어난다. ‘창극 수궁가’는 국립창극단(예술감독 유영대)에서 창극 110년 역사상 최초로 세계시장을 겨냥해 야심차게 준비해 온 작품이다. 공연은 오는 9월 8일~11일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세계국립극장 페스티벌 개막작으로 세계초연되며, 12월 22일~23일 독일 부퍼탈 시립극장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해외무대에 진출할 예정이다.
아힘 프라이어(77)는 극작가이자 연극개혁가인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의 수제자로, 50여년간 평생 150여편의 오페라를 연출하였으며, 오늘날 가장 존경 받고 있는 추상주의 무대 연출가 및 디자이너이자 비주얼 아티스트이다. 뉴욕타임즈는 그를 "현재 오페라무대에서 활동하고 있는 사람 중 가장 위대한 연출가이자 아티스트”라고 평한바 있다.
지난해 그가 연출하여 LA오페라극장에서 막을 올린 바그너의 4부작 오페라 <니벨룽겐의 반지>는 350억원이 넘는 제작비와 '무대와 이야기와 음악이 있는 그림'이라는 컨셉으로 세계적으로 화제를 뿌렸으며, LA오페라극장장이자 제작자인 테너 플라시도 도밍고는 “아힘 프라이어는 천재적인 발명가이며, 그의 세계에는 환상이 풍부하다”라고 극찬하였다. 그의 작품들은 개막직후에는 적지 않은 논란을 불러일으키지만, 결국 롱런하며 대히트를 기록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1982년 초연 후 현재까지 함부르크와 드레스덴에서 장기공연중인 <마술피리>, 베를린 국립극장의 <세빌리아의 이발사>, 슈투트가르트 오페라하우스의 <마탄의 사수> 등이 모두 그의 작품으로, 30~40년간 장기공연되며 매회 전석매진을 기록하고 있다.
비쥬얼 아티스트로도 유명한 아힘 프라이어는 이번 ‘창극, 수궁가’에서 연출 뿐 아니라 의상과 무대, 조명디자인까지 도맡는다. 독일 표현주의 미술의 대표주자였던 그의 작품은 “오페라를 통해 좋은 그림을 관람했다”라는 평을 들을 만큼 회화적인 무대와 파격적인 이미지가 특징인데, 한국 고유의 예술장르인 판소리가 그의 눈을 통하여 어떠한 무대로 형상화될 것인지에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한국인의 얼과 혼이 담긴 판소리를 최대한 원형 그대로 무대에 올리면서도, 세계무대에서 외국인들의 정서에도 어필할 수 있도록 만들겠다는 것이 그의 목표이다.
국립창극단 ‘춘향 2010’ 관람 후 판소리에 매료
푸른눈을 가진 독일계 오페라의 거장이 어떻게 창극에 눈뜨게 되었을까? 거기에는 그의 한국인 부인의 역할이 크다. 지난해 아힘 부부가 관광차 한국을 찾았는데, 그에게는 첫 한국 방문일 뿐 아니라 아시아를 최초로 방문한 것이기도 했다. 그때 임연철 국립극장장의 초청으로 국립창극단의 ‘춘향 2010’을 관람하였는데, 아힘은 공연을 보고 생애처음으로 접한 판소리를 기반으로 삼은 창극에 매료되고 말았다. 때마침 창극의 세계화 작업을 추진하고 있었던 국립창극단측은 이같은 분위기를 감지하고 그에게 창극 연출을 제안하였지만 쉽사리 성사되지는 못했다. 아힘에게는 이미 향후 몇 년간 유럽 유수의 극장들과의 작업 스케쥴이 확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국립극장은 포기하지 않고, 같은 해 12월 유영대 창극단예술감독과 임상우 예술단기획팀장이 직접 독일을 방문, 그를 설득하였다. 노력은 헛되지 않아서 마침내 아힘 프라이어는 제안을 수락했고, 이 소식을 들은 독일 부퍼탈극장으로부터 공연초청까지 받게 된 것이다.
아힘의 주변에서는 “오페라계에서 명성을 쌓았는데 왜 모험을 하느냐”며 만류했지만, 그의 한국인 부인은 ‘반드시 해야 할 위대한 작업’이라며 창극연출을 적극 권유하였다. 그 역시 가장 한국적인 음악인 판소리를 전 세계인들이 공감할 수 있는 공연으로 만들겠다는 욕심이 생겨났다.
그 후 작업은 속전속결이었다. 참여가 확정된 지난해 12월부터 지금까지 아힘 프라이어는 끊임없는 영감과 열정으로 상당한 분량의 작업을 해나가고 있다. 현재 그는 연출 컨셉은 물론이고, 무대디자인, 의상디자인 및 일부 제작까지 마친 상태이다. 일반적인 공연제작일정에 비추어볼 때 이는 대단히 놀라운 속도라는 것이 공연계의 평이다. 이번 일주일간의 짧은 방한 일정에서도 매일 국립극장을 찾은 그는 아침부터 자정이 가까운 시간까지 잠시도 쉬지 않고 의상과 무대작업에 몰두하는 모습을 보여 국내 스태프들을 긴장하게 만들었다는 후문이다.
판소리 수궁가가 어떻게 창극 수궁가로 탈바꿈할 것인가
아힘 프라이어는 지난 3월 26일 국립극장에서 열린 ‘완창판소리-송순섭의 박봉술제 수궁가’를 유영대 예술감독과 함께 약 4시간 동안 한시도 자리를 뜨지 않고 관람하였다. 한국인도 어지간한 판소리 애호가가 아니면 힘들다는 완창 감상을 그가 즐길 수 있었던 요인은 무엇일까? 아힘은 “판소리는 인간의 본질적인 언어와 음악이 담겨져 있는 완전한 예술이기 때문에, 언어가 통하지 않아도 매번 굉장한 감동을 받는다”고 한다. 특히 송순섭 명창의 소리를 감상하면서, “노래부르는 자세, 여유, 무대 매너, 그리고 노래의 감정표현이 플라시도 도밍고를 연상시킨다. 최고의 기량을 가진 세계 최고의 가수다”라고 평가하였다.
어쩌면 판소리는 인간의 본질을 직시하고 현실의 부조리를 고발하는 아힘 프라이어의 작품세계와 가장 부합되는 장르일지 모른다. 판소리는 당대의 현실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조선후기에 민중예술의 한 형태로 산출된 판소리는 민중의 삶을 역동적으로 반영하면서 그 안에서 함께 즐기고, 그러는 가운데 자연스레 현실세계에 대하여 명확한 인식을 갖게 해주는 능동적인 예술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아힘 프라이어는 동물을 의인화하여 인간사회를 풍자한 ‘수궁가’를 주저없이 선택하였다. 판소리 다섯마당 중 가장 은유와 해학이 충만한 수궁가는 현대인의 본질과 현대사회의 문제를 풍자하는데 가장 적합했던 것이다. 그동안 수궁가는 별주부전 또는 토끼전 등으로 각색되어 아동 대상이나 대중적인 공연으로만 존재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2011년 국립창극단과 아힘프라이어의 ‘창극 수궁가’는 현대의 지성인들을 위한 고품격 수궁가로 전혀 새롭게 태어난다. 개성과 상징, 그리고 은유로 가득한 극중 동물들은 관객들에게 웃음뿐 아니라 관람 후에도 기나긴 사색과 여운을 선사할 것이다.
아힘은 ‘창극, 수궁가’의 감상 포인트는 ‘(판)소리와 가면’이 될 것이라고 귀띔한다. 그는 판소리를 창자의 육성 그대로 전달하기 위해 인공적인 음향장치를 최소화하는 한편, 과장된 기법의 가면(mask)을 통한 캐릭터 묘사로 청각과 시각이 효과적으로 집중된 무대를 보여줄 것이다. 우리 창극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할 이번 작업이 가슴 뛰도록 기대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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